삶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

2013. 12. 20. 09:20살며 생각하며

한국은 국가 정치권이 문제를 일으킨다 한다. 

맞다. 국가 정치권이 문제를 더 크게 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정치권이 어떻게 유지될까?

기반도 저변도 없는데 정치권 자체로 붕 떠서 살아있을까?


아니다. 

기반이 없다면 그 무엇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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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치권의 기반은 무엇일까?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는 모든 권리를 인정받는데, 

오직 국가 정치에서만 권리를 침해당할까?


삶의 자리에서는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는데, 

오직 국가 정치에서만 민주적 절차를 무시당할까?


삶의 자리에서는 발언의 자유를 갖는데, 

오직 국가 정치에서만 발언의 자유를 침해당할까?


삶의 자리에서는 자기결정권을 갖는데, 

오직 국가 정치에서만 자기결정권을 무시당할까?


그러므로 저 기반도 없고 저변도 없고 뿌리도 없는

모래성 같은 썩은 국가 정치만 공격하면 

세상은 평화로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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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다. 역부족이다.

썩은 정치는 모래성이 아님을 오래도록 확인했지 않는가?


썩은 정치는 넓고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저토록 견고하다. 


그렇다면 뿌리, 기반, 저변은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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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에서 권리 침해를 수용하니

국가 정치에서도 권리를 침해당한다. 


삶의 자리에서 비민주적 원리를 용인하니 

국가 정치에서도 민주적 원리를 무시당한다. 


삶의 자리에서 발언의 자유를 스스로 자제하니

국가 정치에서도 발언의 자유를 제한받는다. 


삶의 자리에서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반납하니

국가 정치에서도 자기결정권을 무시당한다. 


삶의 자리에서 내 연차도 마음대로 쓸 권한이 없어도 

삶의 자리에서 기관 정책에 참여할 기회가 없어도

삶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의견 표명조차 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수용하는 순간부터


내가 있는 삶의 자리가 곧 썩은 국가 정치의 뿌리에 

양분을 공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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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토록 작은 곳에 집중하느냐... 

큰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나는 나에게 답한다. 


누군가는 썩은 국가 정치를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삶의 자리를 바꿔야 한다. 


내가 선택한 삶의 자리 곧 사회복지 현장은 비록 작지만,

이 삶의 자리야말로 뿌리요, 기반이요, 저변이다. 


내가 내 삶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썩은 정치의 뿌리를, 기반을, 저변을 조금이라도 끊어내는 것이니, 

최소한 조금이라도 양분을 공급하지 않는 것이니,


이야말로 썩은 정치의 뿌리를, 심장을 조준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는 비록 작은 것을 하며 소리없이 사라진다 해도

뿌리와 심장을 공격한 삶을 지키려한다. 


그래서 나는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